수현의 이야기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고 취직을 해도 여전히 가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현실을 비춘다. 수현이 가족은 오랫동안 기초생활수급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소식이 끊긴지 오래다. 엄마는 공황장애를 앓는 장애인이어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었다. 수현은 한 살 터울인 언니에게 의지하며 활달하고도 모범적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수현은 성실한 학교생활을 토대로 유아교육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생활도 매우 열심히 임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매달 안정적인 월급을 받았다. 임대주택을 분양받느라 대출이 조금 있었지만 아동기에 살았던 집에 비하면 안정적인 주거환경이어서 만족스러웠다. 수현은 이제 자신과 언니가 번 돈으로 대출을 갚으며 착실하게 잘 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 다닐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현실적인 문제들이 수현을 옥죄고 초조하게 했다. 이런 불안 증상은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주었다. 좋은 직장을 얻기까지 수현은 쉼 없이 앞만보고 달려왔다. 취직하기 전까지 잠깐이라도 바로 수급자격을 잃고 각종 지원이 끊어져서 아픈 엄마를 돌볼 수 없고 생활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수현이 안정된 직장을 얻고도 빈곤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 원인은 엄마와의 관계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된 사정이지만, 수현이가 대학에 다니는 동안 교통비, 책값, 기숙사비, 월세 등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현금 융통이 급한 엄마의 약점을 노린 금융사기는 수현의 미래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빈곤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고 안전망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앞에 닥친 상황에서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의도하지 않게 심지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복잡한 일에 연루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더욱이 엄마의 정신질환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밤마다 화투판을 전전하는 엄마를 수현이가 감당하기에는 한계에 이르렀다. 엄마는 아이들이 건네는 돈에만 관심이 있는 듯 했다. 엄마의 알수없는 사생활이 수현이의 삶마저 갈가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엄마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현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관계에 얽히고 여기서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에 대해 어찌할 줄을 모르고 매우 불안해했다. 불안증세와 우울증이 동시에 찾아왔다.
한국사회는 아직까지 자식이 부모를 돌보아야 한다는 '효'를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를 개인에게 지우는 가족 중심 문화가 강력하다. 성년이 된 청년은 독립적인 개인이기보다는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감을 갖게한다.
수현은 대학 때부터 개인적인 꿈이 있었다. 편입을 해서 4년제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싶었고, 취직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도 따고 싶었고, 관심 있던 패션 공부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많은 꿈들은 조금씩 퇴색되어갔다. 수현은 적은 월급에 이것저것 떼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미래를 위해 뭔가를 계획하고 저축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가 수현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중대한 결심을 했다. 엄마로부터 떨어져 나오기로 한 것이다. 아니 도망치듯 엄마를 떠났다. 엄마가 자신도 모르게 또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스스로 살아야 겠다는 절박함과 생존 본능에 따른 결정이었다. 하지만 한 몸처럼 살아왔던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과정은 생살을 찢는 것과 같은 고통이 있었다. 이제 수현은 행복주택으로 입주했고, 직장도 더 좋은 곳으로 옮겼다. 이렇게 수현은 엄마에게서 독립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많이 갖게 되었고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독립의 과정으로 수현네 가족은 모두 변화를 겪었고 서로 조금씩 성숙해졌다.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보다 엄마와의 관계 재정립이었다. 수현은 '가족'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런 인식은 더 넓게 확장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달라졌다. 지금 수현네 가족은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잘 영위하고 있다. 엄마는 딸들과 적절히 연락하고 만나고 있고, 언니는 직장생활과 결혼생활을 잘 이어가고 있다. 수정도 결혼을 준비 중이다.
수현이의 삶을 보면서 힘든 고통의 순간에도 삶을 희망하는 줄기를 잡고 있으면, 결국에는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부모의 과오 혹은 문제행동으로 고통받는 자녀들이 있다. 부채가 자녀에게 전가되거나, 부모의 과오를 해결하라고 압박받는 경우도 있다. 부모의 문제를 자녀가 외면하지 못하고 해결해주기도 한다. 가난한 가정의 부모는 사회적 지지체계가 약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타의 다른 수단이 없는 경우가 많다. 수현은 엄마와 연관된 크고 작은 일들 때문에 경찰서를 들락거리고, 공과금이 연체되고, 신용불량의 위험에 처하거나 빚쟁이들이 따라오는 고통을 겪었다. 빈곤의 문제는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 우리가 모르거나 스스로 개선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빈곤가정의 아이들만큼은 지역사회에서 보호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할 마땅한 일일 것이다.
청년 세대의 가난은 과도기적이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일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현재의 가난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지만, 직업훈련 지원, 주거 안정 자금, 일-학교 혹은 일-가정 병행 지원 제도 등이 더 절실해 보인다. 이런 제도들은 가난한 청년들에게 평생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안전망이 될 것이다.
(광고:음향,영상 설치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