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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농담]

쏠헤커 2025. 1. 28. 11:56



1950년대 체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 정권 치하의 한 대학. 루디빅은 밝은 미래를 꿈꾸는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강의에 참여하며, 학문과 연애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학을 앞둔 어느 날, 루디빅은 여자친구 마르케타에게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공산당 교육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기대와 설렘을 가득 담아 보낸 편지였다.
“루디빅, 그곳에서 혁명 정신을 배우고 진정한 당원의 자세를 익힐 거야. 너무 설레고 기대돼!”

편지를 읽은 루디빅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지나친 열정과 이상주의가 못내 불편했다. 공산당의 강요된 낙관주의를 진심으로 믿는 그녀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순간의 충동으로 루디빅은 엽서를 써 내려갔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그는 엽서를 우체통에 넣으며 가볍게 웃었다. 단순한 농담이었다. 아무리 당이 엄격하다 해도, 이렇게 작은 농담 하나에 문제가 생기겠는가?

몇 주 후, 루디빅은 대학교 당위원회로 호출되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회의실에 들어선 그는 엄숙한 분위기에 움츠러들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파벨이 위원회석에 앉아 있었다.

“루디빅 동지, 당신이 보낸 엽서의 내용은 공산당에 대한 심각한 모독입니다. 어떻게 해명하겠습니까?”

루디빅은 멍하니 서 있었다. 친구 파벨을 바라보며 묵묵히 도움을 기대했지만, 파벨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고 있었다. 결국 루디빅은 대학교에서 퇴학당했고, 반혁명 혐의로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 생활은 혹독했다. 하루 종일 석탄을 나르고, 차가운 바람 속에서 땀과 먼지가 뒤섞인 옷으로 버텨야 했다. 루디빅은 자신을 배신한 파벨에 대한 분노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파벨, 넌 내 가장 친한 친구였어. 내가 너를 믿었던 만큼, 너도 나를 지켜줬어야 했어. 언젠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15년이 흐르고, 루디빅은 수용소에서 풀려났다.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지쳐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복수에 대한 집념이 불타고 있었다.

루디빅은 파벨을 찾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작은 마을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을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그는 복수의 시나리오를 그렸다. “그에게 내가 겪은 고통을 반드시 느끼게 할 거야.”

하지만 마을에서 마주한 파벨은 루디빅의 기억 속 파벨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희끗희끗한 백발이 되었고, 허리는 구부정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친절한 파벨 아저씨’라 불렀다. 그는 더 이상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루디빅은 그를 술집에서 마주쳤다. 파벨은 루디빅을 보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루디빅! 네가 살아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루디빅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내가 왜 여기 온지 모를 리 없겠지.”

파벨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그날 너를 도와주지 못한 건 평생의 후회로 남았어. 하지만,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나도 위원회의 명령을 거부했다면 처벌받았을 거야.”

루디빅은 파벨의 말을 들으며 과거의 기억이 밀려왔다. 복수라는 집념이 순간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복수하려던 대상이 사실은 과거에 갇혀 있는 자신의 환상일 뿐임을 깨달았다.

술집을 나와 어둑한 거리를 걷는 루디빅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15년간 그를 지탱했던 복수심은 그의 현재를 붙잡고 있던 쇠사슬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모든 것은 과거일 뿐이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간이다.”

루디빅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는 과거를 두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이제 그는 깨달았다. 진정한 자유는 과거에 매이지 않는 현재를 살아가는 데 있다는 것을.